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CA 리버 플레이트 (문단 편집) == 역사 == 1901년 5월 25일, 산타 로사(Santa Rosa)와 라 로살레스(La Rosales)라는 2클럽이 합병하는 형태로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라보카(La Boca)에서 설립되었다. 이후 명칭은 여러 후보 이름 중에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리버 플레이트라는 명칭으로 결정되었다. 이름이 결정된 경위는,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인 페드로 마르티네스가 선박 컨테이너에 '더 리버 플레이트(The River Plate)'라는 [[영어]] 문자가 쓰여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동료에게 팀 이름으로 제안했는데 받아들여진 것이다. 리버 플레이트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란디(Sarandí)에 있는 경기장을 잠시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후에 라보카로 돌아가 레콜레타(Recoleta)로 이전하였다. 클럽은 레콜레타에 경기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1938년 현재의 위치인 누녜스(Núñez)와의 관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에노스아이레스 북부의 벨그라노(Belgrano) 이전을 강요하였다. 1938년 5월 25일에 에스타디오 모누멘탈(현 에스타디오 안토니오 베스푸시오 리베르티)이 개장하여 CA 페냐롤과의 기념 경기가 열렸다(3-1 승리). 이후 현재까지 홈 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당시 리버 플레이트는 라이벌 보카 주니어스 등과 함께 아르헨티나 리그를 씹어먹던 강팀이었다. '[[라 마키나]](La Maquina)'라고 불린 공격진을 앞세운 리버 플레이트는 10년간 4회 우승을 거두었고 라 마키나는 그대로 [[|코파 아메리카]]에도 출전하여 아르헨티나의 대회 3연패를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물론 그 과정에서 모든 대회에 그대로 참가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 1996/1997 시즌에는 [[마르셀로 가야르도]], 후안 파블로 앙헬, [[아리엘 오르테가]], [[에르난 크레스포]], [[후안 파블로 소린]]으로 구성된 공격 편대를 일컬어 '라 마키니타(La Maquinita)'라고 불렀다. 라 마키티나는 '작은 기계'라는 뜻이다. 96-97 시즌 리버 플레이트는 여기에 [[산티아고 솔라리]], 마티아스 알메이다, 첼소 아얄라도 있어 남미 클럽 축구 역사상 최강팀 중 하나로 꼽힌다. 오랫동안 아르헨티나의 명문 클럽으로 군림해왔던 리버였지만, 1991년에 호세 마리아 아길라르가 회장으로 취임한 후 클럽은 경영 위기를 비롯한 문제를 안게 되었다. 그중에는 클럽이 바라브라바(barrabrava, 남미의 과격한 서포터 집단을 이르는 말)에게 이익을 주는 유착 구도도 존재하고 있었다. 2007년에는 [[곤살로 이과인]]의 이적으로 얻은 이익을 서로 빼앗고 바라브라바 간 파벌 투쟁이 일어나고, 그 중 멤버가 총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클럽의 성적도 부진하고, 클럽 사상 최초로 2부 리그로 강등될 위기에 직면하였다. 2007년 후기 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명문 팀이 부활할 것이라고 생각되었지만, 다음 시즌 전기 리그에서 최하위에 그치고, 또한 2009-2010 시즌에도 전기 14위, 후기 13위로 하위권에 그쳤다. 2010-2011 시즌 다시 상위권을 되찾고 이듬해 코파 수다메리카나 출전권 획득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마지막 경기에서 라누스에 패배하여 과거 3시즌 평균 성적을 역전당하고 2부 리그 4위 CA 벨그라노와 프로모시온(promoción)이라고 불리는 승강 플레이 오프에 돌입하게 되면서 출전권을 박탈당하였다. 또 리버의 2010-11 시즌 후반 성적은 9위였지만, 아르헨티나 리그는 과거 3시즌 평균 성적으로 강등 팀을 결정하므로, 결과적으로 2008-09 시즌 부진이 클럽이 프로모시온(promoción)에 돌입하게 만들어 버렸다. CA 벨그라노와의 플레이 오프 1차전에서 팬의 난입으로 20분 이상 추가 시간이 늘어났고, 그 결과는 0-2 패배였다. 홈에서 맞이한 2차전에서 2점차 이상의 승리가 필요했지만, 관중 폭동에 의해 후반 44분 경기가 중단된 채 1-1로 비겼다. 따라서 리버 플레이트의 클럽 사상 첫 2부 리그 강등이 결정되었다. 경기 후 흥분한 팬들이 소요 사태를 일으켰으며, 미리 투입되어 대기하고 있던 경찰 2,200명이 이를 진압하였다. 아르헨티나 당국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68명이 부상당하고 50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10628/38360284/1|아르헨 축구 명가 110년만에 2부 강등]]] 아르헨티나 국민의 절반 가까운 팬을 거느리는 리버가 2부 리그에 참가하게 되면서 유료 케이블 방송뿐이었던 2부 리그 TV 중계가 지상파 국영 방송에서도 이루어지게 되어, 일간지 스포츠 칸과 스포츠 신문에 2부 리그 경기 일정이 크게 실리는 등, 아르헨티나 국내에서 2부 리그에 대한 정보가 크게 증가하는 현상을 보였다. 2012년 시즌 처음으로 참가한 2부 리그에서, 명문 팀을 상대로 승리를 노리는 의욕 넘치는 상대에게 고전을 하기도 하였지만, 최종 라운드에서 전 프랑스 국가 대표 [[다비드 트레제게]]의 2골에 의해 승리를 거두고 2부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1년 만에 1부 리그에 복귀하였다. 승격 후 2013-14 시즌 피날에서 우승하며 36번째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2013/2014 시즌, 전기 리그 우승팀과 후기 리그 우승팀이 맞붙어 최종 우승팀을 가리는 수페르코파에서 헤르만 페세야의 헤더로 산 로렌소를 1-0으로 누르며 우승을 차지했다. 이로써 리버는 2014 [[코파 수다메리카나]] 출전 자격을 얻었으며, 2015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도 출전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2014년 5월 28일, 팀을 우승으로 이끈 명장 [[라몬 디아스]] 감독이 사임을 발표했다. 팬들은 [[멘붕]] 상태. 사임 이유는 일절 밝히지 않았으나, 자신에게 호의적이었던 구단과 보드진, 팬들, 선수들에게 감사를 전했다. 후임으로는 자신의 첫 커리어인 우루과이 [[클루브 나시오날 데 푸트볼|나시오날]]에서 리그 우승을 이끈 [[마르셀로 가야르도]] 감독이 지목되었다. 또한 리그 우승 이후 팀의 에이스였던 [[카르보네로]]는 [[AS 로마]]로,[* 이후 곧바로 체세나로 임대되었다.] 차세대 공미로 기대받던 [[마누엘 란시니]]는 [[알 자지라]]로 이적하였다. 2014년 마르셀로 가야르도 감독은 기대치가 높은 상황에서도 빠른 시간에 팀을 장악하여 좋은 경기력을 보여줬다. 초반 압도적인 화력으로 리그 1위를 질주하기도 했지만 2위로 마감했다. 그러나 코파 수다메리카나에서 클럽 역사상 최초로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2015년에는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 2018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결승에서 라이벌 보카 주니어스를 만나게 되어 대회 역사상 처음으로 수페르클라시코 결승전을 치렀다. 1차전 보카 주니어스의 홈에서 2:2 무승부, 2차전 중립 구장 [[에스타디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2차전은 리베르의 홈 경기였으나 경기 전 소동으로 연기되었다가 국외에서 치르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3:1 승리를 거두어 합계 5:3으로 우승을 차지하였다. 2019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 대회 4강전에서도 보카 후니오르스를 탈락시키며 2년 연속 결승에 올랐지만 브라질 [[CR 플라멩구]]에게 1-2로 져서 우승은 실패했다. 2020년 코파 리베르타도레스는 4강에서 브라질 [[파우메이라스]]와 1승 1패를 주고받았으나 2:3 골득실로 밀려 탈락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